나를 보내지 마

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 저/김남주


완독: 2018.11.28


-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1) 클론(복제인간)들을 위한 학교인 헤일셤 학교의 학생들의 성장 소설. 성장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건 캐시와 토미 한정인가.

 2) '인간' 혹은 '인간성'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책.


  이상하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만 해도 별 느낌이 없었고 단지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게 하는 좋은 책이라고만 느꼈는데 방금 복제인간들을 위한 학교라는 문장을 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눈물이 날 뻔 했다. 아마도 클론들에게 감정 이입이 됐나보다. 좋은 책이구나.


  완독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한 후 2번이나 연기하고서도 반납 마지막 날 겨우 다 읽어냈다. 그리고 반납 당일에 꾸역꾸역 읽어낸 책의 마지막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자 가장 좋았던 부분이었다. 사실 마지막 부분에서 책의 주제를 대놓고 알려주기도 하지만. 내용의 거의 80프로를 헤일셤 학생들의 일상으로 채운 것은 그들도 근원자들과 별다를 것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걸까.



  헤일셤 학교가 클론들에게 준 것은 무엇인가. 자신들의 근원자를 위한 기증의 도구일 뿐인 클론들에게 예술을, 세상을 가르치는 것은 무슨 쓸모가 있는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무엇 때문가.


  쓸모는 없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야 한다. 왜냐면 클론들 역시 인간이니까. 헤일셤 학교는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는 근원자를 위해 기증을 하다 죽는다 하더라도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인간으로 살다 가는 것. 헤일셤은 그 기회를, 그 권리를 클론들에게 주었다. 다른 곳에서는 클론을 사육했지만, 헤일셤은 클론들을 '교육'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교육인가?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정답이 없는 질문들이 날아온다.





+ 읽는 내내 루스 비호감이어서 좀 힘들었다.


+ 한 가지 상상. 헤일셤에 들러 학생들의 작품을 화랑으로 가져가곤 했던 마담 마리클로드는 사실 교장 에밀리와 함께 같은 목적으로 헤일셤을 운영(?)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녀는 에밀리의 클론이 아닐까? 에밀리가 자신의 클론을 구해낸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만약 책에서 마담이 에밀리를 닮았다는 언급이 한 마디라도 있었다면 백프로일텐데 그런 부분은 아마 없었던 것 같고, 마담의 정체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제대로 좀 읽자....). 마담이 클론들을 보면 얼어버린다는 표현을 봐서는 클론이 아닐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 낭만적인 상상을 하고 나서 이 책이 더 좋아졌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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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고래

천명관



길거리에서 어느 이야기꾼이 사람을 홀리는 말솜씨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 앞에 자리 잡고 바닥에 철푸덕 앉아서 듣는 기분. 지루할 틈이 없다. 처음부터 매료되고, 어떻게 이렇게 계속해서 재미있을 수 있지? 점차 재미가 고조되는 게 아니라 그냥 한결같이 계속 재미있다. 그래프로 따지자면 싸인 코싸인 그래프가 아니라 마치 y=n 처럼 y값이 항상 일정한, 즉 항상 재미있는 소설. 다만 3부에서는 조금 힘이 빠진 듯. 결말로 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내리막길처럼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다.



와.. 이 책은 진짜 대단하다. 엄청나다. 너무 흔하고 널린 소재라 이제 신물이 나는 1900년대를 배경으로 글을 썼는데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있나??? 워낙 이 책에 대한 칭찬을 많이 봐왔던 터라 나름 기대가 컸는데, 그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으며 오히려 훨씬 상회한다. 책의 초반부를 읽으면서는 재미있긴 하네, 평가가 괜찮을 만 하군, 정도였는데 계속 읽어가다 보니 와 이거 왜 사람들이 왜 그렇게 극찬했는지 알겠다는 느낌? 히야…. 대다내. 이야기가 폭발한다는 표현이 딱 적절할 것 같다.


적당한 거리를 두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정 이입이 되어서 주인공의 희노애락을 같이 느끼기보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게 됨.


“독자들이여” 라던지, “그녀가 누군지 벌써 잊은 건 아니시겠지?” 라는 식으로 화자가 직접 개입하는 부분이 있는데, 옛날 옛적에 많이 쓰이던 거의 뭐 설화나 고전 소설에서나 나왔을 법한 방식이 요즘 책에서 나오니 오히려 신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솜씨가 탁월해서 정말 재미있다. 신기하다. 시작부터 단숨에 몰입하게 하더니, 인물 별로 서로 다른 에피소드를 풀어가는데 전혀 지루하지가 않고 난잡하다는 느낌도 없다. 중간 중간 익살스러운 표현들도 재미있다.



노파와 반편이 사이에서 벌어진 이후의 이야기는 암컷과 수컷 사이에서 일어난 수많은 이야기, 그 허망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쉴새없이 만들어지고 부풀려지며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해 끝없이 퍼져나가 마침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된, 여느 합궁에 대한 이야기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녀는 근처에서 부엌살이를 하던 동향 친구를 만나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주고받았고, 일단 컨베이어벨트에 올려진 귓속말은 곧 자동공정을 통해 매우 그럴듯하고 선정적인 이야기로 부풀려져 온 동리를 거쳐 인근마을에까지 퍼져나갔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일찌감치 장터를 떠돌다 여자를 만나 결혼도 했지만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호떡장수와 눈이 맞아 달아나는 바람에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도 말솜씨가 좋았지만 이즈음해서는 그 솜씨가 더욱 늘어 어찌나 조리 있고 구변이 좋던지 이야기자락마다 한숨이요, 눈물이요, 박장대소였다.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즈음에는 청산유수로 쏟아내는 그의 말솜씨에 세 여자가 모두 넋을 잃어 국이 졸아붙는지 밥이 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것은 구라의 법칙이었다.


구라의 법칙ㅋㅋㅋㅋㅋㅋㅋ 어떤 작품을 읽고 나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도 다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 책인듯. 작가님의 위트가 너무 내 스타일이야.




살인과 강간은 범죄가 되었고 도둑질과 방화, 싸움질이나 남의 물건을 사사로이 빼앗는 것 또한 금지되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별로 할 일이 없어져버렸다.


이날 쏟아진 구호들 가운데, ‘벽돌을 못 쓰게 죄다 깨뜨려버립시다!’나, ‘가마를 부숴버립시다!’ 혹은 ‘공장에 불을 질러버립시다!’와 같은 주장은 잔뜩 화가 난 일꾼들 사이에서 일견 나올 법한 얘기였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온 ‘파쇼에게 죽음을! 노동자에게 생존권을!’이나 ‘재벌독재 타도하여 노동자 천국 이룩하자!’와 같은 구호는 산골짜기에 있는 벽돌공장에서 써먹기엔 다소 유난스런 감이 없지 않았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나 ‘수령님의 영도 따라 미제를 박살내자!’와 같은 구호는 다소 수상한 감이 없지 않은데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벽돌공장 웬 말이냐!’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독재 물러가라!’와 같은 구호는 다소 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는데, 또 어디선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영숙아, 사랑해!’나, ‘씹할, 그때 홍싸리를 먹는건데’와 같은 소리는 그야말로 구호도 아니고 뭣도 아닌, 분위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내지른 잡소리에 불과했다 아니할 수 없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영숙아 사랑해!ㅋㅋㅋㅋㅋㅋ 아 이거 이 내용만 써 놓으니까 다 전달이 안 될 텐데, 분명 다른 사람들도 이 책을 읽다가 이 부분에 당도했을 때 킥킥 댔을 거야 분명.ㅋㅋㅋㅋㅋ홍싸리가 왜 나와ㅋㅋㅋㅋ



사람들은 하는 일이 없어도 괜히 마음이 바빠 허둥거렸고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이유 없이 속이 헛헛해 다방을 찾아가 독한 커피라도 한 잔 들이부어야 겨우 속이 차는 듯싶었다. 또한 다방에 앉아 하릴 없이 이 말 저 말 옮기다보니 사람들 간의 관계는 더욱 번잡스러워졌고 시비는 늘어났으며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하느라 술값이, 혹은 커피 값이 더 많이 들어가 소비가 더욱 촉진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마음 속엔 어느덧 공허가 가득 들어찼고 금복은 이를 차곡차곡 돈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이었다.


곧 미사일론에 대한 반박이 뒤따랐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노파가 어떻게 미사일을 아느냐는 거였다. 귀신이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다는 해명에 대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라는 반박이 나왔으며, 뒤이어 어따 대고 선배 앞에서 그따위 개소리를 하느냐는 성명이 발표되자, 너 대학 어디 나왔냐는 질문이 나왔고, 이 씹쌔야, 어딜 나온 게 무슨 상관이냐는 반론이 제기되자, 저 새끼, 싸가지 없는 건 학교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는 인물평과, 저 새끼는 학계에서 완전히 매장시켜버려야 된다는 매장론이 뒤따랐으며, 선배 무시하다 뒈지게 맞고 피똥 싼 놈 많다는 협박과, 누군 씹할, 고스톱 쳐서 학위 딴지 아냐는 고스톱 학위론, 그럼 씹쌕꺄, 미사일이 아니면 도대체 뭐냐, 뭐긴 뭐야, 색꺄, 니 애비 좆이라니까, 라는 식으로 반박이 줄줄이 이어지며 논쟁은 점점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어 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래란 무엇일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실 고래의 의미에 대해서는 책의 중반부에 이미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싶지 않은 까닭은,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 아닐까? 그럼으로써 그녀를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 안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그 옛날 남발안의 계곡을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추천한다,는 상투적인 표현을 쓰기엔 이 책에 미안할 정도다. 하지만 추천한다. 꼭 읽어보시길!

저스티스맨

저스티스맨

도선우



 예전에, 자주 들여다볼 만한 독서 블로그가 있을까 해서 검색해보다가 한 블로그를 발견했었다. 워낙 글을 시니컬하면서도 유쾌하게 쓰시길래 즐겨찾기에 추가해두고 자주 들렀었는데 어느 날 보니 모든 글들이 다 삭제되어있고 글쎄, 블로그의 운영자가 책을 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책은 <스파링> 이었고 그 블로그 운영자가 도선우님이었다. 그 분의 블로그 글들을 워낙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책도 읽어보고 싶었지만 책의 줄거리가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선뜻 끌리지 않았는데 마침 두 번째 책이 있다고 해서 골랐고, 그것이 <저스티스맨>이다.


 마치 정의 구현의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듯한 연쇄 살인이 책의 주제이고 살인 그 자체나 살인범을 추리하는 내용보다는 피살자가 왜 살해 당하게 되었을까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각각의 피살자들은 마치 작가가 어떤 유형의 인간상을 세상에 고발하고 싶은지를 말하는 듯하다. 또한 이 연쇄 살인 사건과 관련된 내용은 ‘저스티스맨’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인터넷 까페를 통해 세상에 공유되는데, 익명성 뒤에 숨어서 더욱 난폭해지거나 사소한 것에도 쉽게 선동되는 네티즌들의 모습 등 현재 우리가 인터넷 상에서 보고 겪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형식만 소설이다 뿐이지 작가가 어떤 시선으로 현 세상을 바라보는지 굉장히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책이 재미 없는 건 아니다. 마무리가 좀 아쉬운 감이 있지만 애초부터 작가가 비중 있게 다루고자 했던 건 살인범의 정체라거나 추리 같은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뭐. 하지만 마지막에 뭔가 헉 하고 독자들이 눈을 한 번 크게 뜰 만한, 혹은 감탄사 한 번 내뱉을만한 내용 정도는 있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흠 내 취향인 건가.


 하지만 아무래도 블로그에 쓰셨던 글 같은 유쾌한 분위기를 기대하고 읽어서 그런지, 사실 소설 그 자체보다는 작가의 말이 더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읽히고 내가 기다렸던 글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저/박선령



  재미있다. 신화라곤 초등학생 때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반에서 순서대로 돌려 읽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전부라 내용은 기억 하나도 안 남 북유럽 신화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읽어서 그런지 편하게 읽었다. 토르가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인지도 몰랐음. 마블에서 만들어 낸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부끄부끄.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의 말로는 재창조에 가깝다는 평도 있던데 난 원작(신화라는 장르에 원작이라는 말도 안 어울리지만)을 모르니 뭐. 그리고 신화라는 게 원래 구전되어 내려오면서 살이 붙고 내용이 변하고 그런 거 아닌가? 역사 연구 용으로 낸 책도 아닌데 재밌으면 됐지 뭐.


사실 예스24 이벤트 도서라서 끼워 샀다. 이벤트 도서를 사야 북 쿠션을 준다길래… 그래서 뤼팽 독서 쿠션을 받았는데 흠. 예전에는 베개 받치고 그 위에 독서대 바치고 읽었던 걸 한 큐에 해결하게 되니 편하긴 하다.


아무튼 이벤트 상품 받으려고 산 책이기도 하고 킬링타임용으로 가볍게 읽은 책이라 특별히 감상평을 쓸 건 없음. 아, 거인이 등장하는 부분에 나오는 유머에서 키득거리긴 했다. 거인이 가장 작은 골무를 찾아서 거기에 맥주를 따라 토르에게 주었다, 토르는 그 양동이(ㅋㅋㅋ) 같은 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라거나 토르가 묠니르라는 망치로 잠자는 거인의 이마를 때렸는데 거인이 잠에서 깨 하는 말이 “이마에 도토리(ㅋㅋㅋㅋㅋㅋㅋㅋ)가 떨어져서 잠에서 깼다” 라거나. 내 스타일이야. 존 스칼지의 <레드 셔츠> 이후로 오랜만에 중간 중간 웃으면서 봤음. 아 레드셔츠는 리뷰 안 썼구나. 아무튼.


쇼코의 미소

쇼코의 미소

최은영



 단편집 중에서 쇼코의 미소가 제일 좋았다. 나머지는 약간..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신파의 느낌이 강해서 다 읽지는 않았음. 그래서 쇼코의 미소에 대해서만 쓴다.


박스 표시는 책에 나온 부분.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나의 삶이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

대학 동기들은 은행으로, 항공사로, 출판사로 저마다 직장을 찾아서 떠났다. 나는 그 애들이 자기가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돈과 안정만을 좇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내게 중요한 건 오로지 의미였다. 나는 나의 꿈을 따라가기 때문에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위했다. 그러나 두려웠다.

(…)

창작은 나에게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고, 나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것이고, 내가 머무는 세계의 한계를 부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늘 돈에 쫓겼고, 학원 일과 과외 자리를 잡기 위해서 애를 썼으며 돈 문제에 지나치게 예민해졌다.

(…)

그래서 꿈은 죄였다. 아니, 그건 꿈도 아니었다.

영화 일이 꿈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꿈을 좇았다면 나는 적어도 어느 부분에서는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감독이 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나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 영화에 타인의 마음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건 착각이었다.

(…)

꿈. 그것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다. 꼬인 혀로 영화 없이는 살 수 없어, 영화는 정말 절실해, 같은 말들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욕망의 비린내를 맡았다. 내 욕망이 그들보다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이 일이 절실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 - <쇼코의 미소> 中



나에게는 꿈이 없다. 아마 이성이라는 것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던 사춘기 무렵부터 없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그저 엄마가 좋아하니까 멋모르고 내뱉었던 ‘판사가 될 거야, 대통령이 될 거야,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 라는 말들을 점점 하지 않게 되면서부터, 사실은 난 되고 싶은 어떤 것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더욱 꿈에 집착했다. 내게도 모든 걸 쏟아부어 쟁취하고 싶은 목표와 그럴만한 열정이 있었으면 했다. 아침 일찍 눈을 떠도 피곤하지 않은, 내일 하루를 더 기대하게 만들고 살고 싶다고 말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했다. 고3 시절엔 절박하게 울면서 기도도 했다. 제발 제가 뭘 하고 살아야 할 지 알려주세요, 제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려주세요, 저를 지으신 창조주, 제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다 헤아리신다는 하나님, 저보다 저를 더 잘 아신다는 주님께서 제게 꿈 좀 주세요 하고. 아마 아는 사람들은 알 거다. 가슴 한 가운데가 텅 비어있는 인생, 스스로 죽을 용기는 없고 그저 살아 있으니까 살아가는 삶에 대한 피로와 권태가 얼마나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지.

나는 남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교실에서 멍하니 수업 받고 있을 때 피나는 노력에 대한 값진 보상으로 금메달을 거머쥐는 연아느님을 보며 박탈감을 느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였던 친구가 관련 학과에 진학하고 관련 분야에 취직해 직업으로 그림을 그리면서도 여가 시간에까지 재미로 그림을 끄적거리는 걸 보며 절망했다.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지도 않으면서 대기업 타이틀에만 목숨 거는 대학 동기들을 경멸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더러운 꼴 다 참아가며 회사에서 버티는 인생만큼은 죽어도 살기 싫었다. 쇼코의 미소에 나오는 소유가 곧 나였다.


나는 여전히 꿈을 찾는다. 그리고 순진하게도 아직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발견하지 못한 것 뿐이라고 믿고 있다. 마치 꿈을 발견하기만 하면 세상이 뒤집어질 것처럼. 그러면서 동시에 서서히 체념한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결국 나도 이렇게 별 볼일 없이 세상을 스쳐가겠구나. 마냥 꼰대로만 보이던 윗사람들도 이런 숱한 체념의 시간을 견뎌왔을까 생각하면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한 편으론 안쓰럽기도 하다.



나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튼튼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매달 갚아야 할 엄연한 빚이 있었으며 언제나 경제적으로 쫓기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가망도 없는 이 일을 계속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글을 써서 책을 내고 작가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포기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했다.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펑펑 울었던 적도 있다. 오래 사랑한 사람을 놓아주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울었다.

가끔 글쓰기에 해이해지고 게을러질 때면 그때 그렇게 울었던 나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이생에서 진실로 하고 싶었던 일은 이것뿐이었다. 망상이고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등단 이후, 오래 짝사랑해온 사람과 연애하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 한 문장, 한 단락,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그 자체로 행복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이고 책상에 앉아 고작 몇 줄을 쓰는 그 지지부진한 시간이 나를 살아 있는 사람으로 살게 했다. 몰두해서 글을 쓸 때만 치유되는 부분이 있었다.

십대와 이십대의 나는 나에게 너무 모진 인간이었다.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부당하게 대했던 것에 대해 그때의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애에게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어깨도 주물러 주고 모든 것이 괜찮아지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따뜻하고 밝은 곳에 데려가서 그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그렇게 겁이 많은데도 용기를 내줘서, 여기까지 함께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작가의 말을 읽으며 작가님이 너무 부러웠다. 물론 더없이 힘든 시간도 참 많았겠지만 무엇을 하는 것 그 자체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 무엇을 함으로써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무엇을 함으로써 치유된다는 것이. 그런 ‘무엇’을 갖고 있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런 게 없는 인생도 존재하는 걸까. 근데 왜 그게 하필 나일까.


애써 잊고 살던 마음 한 구석을 톡 건드려준 책이다. 다시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갖게 해줘서 고마운.


홀 The Hole

홀 The Hole

편혜영



완독: 2017.08.28


“다스케테쿠다사이.”


 계속 번역투의 해외 책들만 읽다가 한국 문학 읽으니 살 것 같다. 역시 모국어가 짱이야.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오기’라는 남자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소설인데 술술 읽힌다. 책의 분위기가 엄청 암울할 것 같아서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절제되어 있어 읽기 편하고 심리묘사도 좋고 흥미진진하다. 후반부는 거의 스릴러임(ㅋㅋ). 등장인물들의 속물적인 면모들이 불편하면서도, 역겹기보다는 오히려 수긍이 갔다. 나였다면 과연 저러지 않을 수 있나, 저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 약한 존재 아닌가 싶고. 물론 이렇게 충분히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절한 단계의 수위(?)이기 때문이겠다. <채식주의자> 같은 책은 사실 나 같은 범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좀 난해했는데 이 책은 훨씬 잘 넘어간다.



 아내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것이 진심이라 믿었지만 대부분 해내지 못했다. 그 일로 깊이 상처받지 않았고 훌훌 털었다. 그리고 재빨리 다른 대상을 찾아 찬탄을 지속했다. 그로써 아내는 동경과 욕망을 구별하는 법을 서서히 익혀나가는 것 같았다.


간혹 자신의 성공만으로 성에 차지 않을 때가 있었다. 가까운 누군가의 실패가 더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오기는 끈질기게 뭔가를 추구하고,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고, 결국에는 성취하고, 한길로만 살아온 것을 자부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있었다. 그들은 의지가 빼어난 나머지 박약한 의지를 손쉽게 비웃었다. 운에 의지하려는 태도를 비난했다. 사소한 우연의 연쇄를 인정하지 않았다. 고집과 독선이 지나쳤고 자신의 자부가 폭력이 된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으며 남들에게 늘 가르치는 투로 말했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자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박탈감을 비웃었다. 간혹 시혜적인 태도로 관용과 아량을 베풀었는데,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제 삶의 여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런 걸 보면 작가라는 직업은 많은 인간 군상들을 관찰하고 또한 그 본성을 예리하게 포착해낼 수 있어야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딱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자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박탈감’이라는 표현 너무 공감되지 않아?



-약한 스포주의-


책의 마지막에 “우리는 무사할 테고, 어떤 일이 있어도 저 너머로 홀로 가지 않겠다고 얘기했다.” 라는 문장이 나온다. “홀로” 라… ‘나 홀로’라고 할 때 그 홀로일 수도 있고 ‘hole이라는 장소로’ 라는 뜻일수도 있겠구나. 작가의 의도겠지? 왠지 마지막을 위해 이 중의적 표현을 벼르고 있었던 느낌이다.




 그나저나 도서관 책에 줄 긋고 필기하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마치 이 책으로 문학 강의를 들었거나 공부를 한 것처럼 중간중간 밑줄이 그어져있고 그 옆에 해석같은 것이 적혀 있다. 이렇게 기본적인 예절도 지키지 못하는데 책을 읽고 분석하고 공부를 하면 뭐해. 지식만 쌓는 것이 능사랍니까. 낙서 볼 때마다 몰입도가 뚝뚝 떨어져서 힘들었다. 나중에는 여력이 닿는 대로 지우개로 지워가면서 읽었음.


 서울의 어느 평생학습관에서 이 책 빌려다 연필로 족족 필기해 두신 분, 반성합시다. 이런 거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는 기술 없나?


신세계에서 1

신세계에서 1

기시 유스케 저 / 이선희



 작가가 떡밥 던지기 장인이시다. 너무 많이 나와서 나중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음. “ ~~해서 우리는 드디어 안심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우리는 ~~했다. 하지만 그 때 그러지 않았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이런 식의 서술이 꽤 자주 나와서 나중엔 그런 문장이 나올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헉 뭐지?’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또 시작이네’, ‘ 왜 또 뭔데’ 하다가 나중엔 ‘어련하시겠어.’ 하게 되고 급기야 정상적인 상황도 떡밥으로 의심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러다 결국 언제 또 떡밥 나오나 은근 기다리게 됨.


 내용은 정말 재미있다. 재미있다는 후기를 많이 봐서 일단 1권만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읽다 보니 빨리 다음 내용을 읽고 싶어서 도서관 문 닫기 전에 빌리러 가려고 퇴근 시간도 조정했다. 기시 유스케는 진정 이야기꾼이구나. 검은 집도 정말 재미있게 봤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해리 포터에 나오는 신비한 동물들이나 약품이나 마법 등등은 신기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싶은데 여기에 나오는 것들은 묘사를 읽으면서도 머릿속으로 그려지지조차 않는다. 이런 상상력은 타고나는 것일까? 어떻게 이 모든 걸 구상하고 이야기로 진행할 수 있을까? 타고난 재능도 있었겠지만 또한 엄청난 노력과 공부가 수반되었을 것이다. 대다내..!


 대학 시절, 방학 때 논문 연구에 보조로 참여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지도해주셨던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어떻게 해야 더 좋은 결과가 나올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방법을 모르겠는데 교수님께서는 매번 다양한 방법들을 조언해 주셨었다. 어떻게 이런 방법을 생각해내신걸까하고 내가 신기해하니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셨던 것 같다(사실 상황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음).  대부분은 젊은 사람들이 더 상상력이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지식을 쌓은 당신께서 너희들보다 더 새로운 생각을 잘 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아집과 딱딱하게 굳은 사고가 걸림돌이 된다고. 그래서 교수님께서도 쉽지는 않지만 최대한 남의 생각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신다고. 참 멋있어 보였고 나도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냥, 작가의 창의력과 상상력 얘기를 하다보니 문득 이 에피소드가 떠오르네.



사토루는 예전에 몰래 읽은 책 속에서 불도그에 관한 내용을 보았다고 한다. 고대 영국에서 소와 싸우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사토루의 말이라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이유에서 나는 그 설을 믿을 수 없었다. 애당초 왜 개와 소를 싸우게 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사토루가 본 책에서는 오락을 위해서라고 쓰여 있었다고 하는데, 인간이 그렇게까지 무의미하게 잔혹해질 수 있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이런 식으로 미래인의 시선을 통해 비판하는 것도 재미있다. 작가의 유머라고 생각한다.



별점 3점 정도의 재미? 어마어마하게 재미있지는 않지만 술술 잘 읽어내려갈 수 있는 정도의 책. 읽어보라고 추천할 정도는 아님. 읽을 거면 읽고 말 거면 말고 정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신기하면서도 공감갔던 구절.


"몇 년 전부터 '은둔형 외톨이'니 '니트족'이니 하는 단어를 종종 접하게 되었습니다. (…) 저는 항상 이런 현상에 해당하는 사람들 (...) 에게 이런 명칭을 부여한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느 집단에 속하거나 직함을 얻음으로써 안도하고 있지 않을까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아무 직함도 없다는 말은 자기가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 하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은둔형 외톨이'니 '니트족'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버리면 그 시점부터 그것이 그 사람들의 소속이자 직함이 되고 맙니다. 사회속에서 '은둔형 외톨이'나 '니트족'이라는 자리를 확보한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안심해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 가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거예요."  - <자애자> 부분 나오키 엄마의 일기 중에서




아니 근데 그래서 와타나베의 어머니의 대답은 뭐였죠?? 네???

가장 궁금한 부분을 알려주지 않고 끝내는 결말이란.... 열린 결말도 아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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