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천명관 저
길거리에서 어느 이야기꾼이 사람을 홀리는 말솜씨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 앞에 자리 잡고 바닥에 철푸덕 앉아서 듣는 기분. 지루할 틈이 없다. 처음부터 매료되고, 어떻게 이렇게 계속해서 재미있을 수 있지? 점차 재미가 고조되는 게 아니라 그냥 한결같이 계속 재미있다. 그래프로 따지자면 싸인 코싸인 그래프가 아니라 마치 y=n 처럼 y값이 항상 일정한, 즉 항상 재미있는 소설. 다만 3부에서는 조금 힘이 빠진 듯. 결말로 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내리막길처럼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다.
와.. 이 책은 진짜 대단하다. 엄청나다. 너무 흔하고 널린 소재라 이제 신물이 나는 1900년대를 배경으로 글을 썼는데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있나??? 워낙 이 책에 대한 칭찬을 많이 봐왔던 터라 나름 기대가 컸는데, 그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으며 오히려 훨씬 상회한다. 책의 초반부를 읽으면서는 재미있긴 하네, 평가가 괜찮을 만 하군, 정도였는데 계속 읽어가다 보니 와 이거 왜 사람들이 왜 그렇게 극찬했는지 알겠다는 느낌? 히야…. 대다내. 이야기가 폭발한다는 표현이 딱 적절할 것 같다.
적당한 거리를 두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정 이입이 되어서 주인공의 희노애락을 같이 느끼기보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게 됨.
“독자들이여” 라던지, “그녀가 누군지 벌써 잊은 건 아니시겠지?” 라는 식으로 화자가 직접 개입하는 부분이 있는데, 옛날 옛적에 많이 쓰이던 거의 뭐 설화나 고전 소설에서나 나왔을 법한 방식이 요즘 책에서 나오니 오히려 신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솜씨가 탁월해서 정말 재미있다. 신기하다. 시작부터 단숨에 몰입하게 하더니, 인물 별로 서로 다른 에피소드를 풀어가는데 전혀 지루하지가 않고 난잡하다는 느낌도 없다. 중간 중간 익살스러운 표현들도 재미있다.
노파와 반편이 사이에서 벌어진 이후의 이야기는 암컷과 수컷 사이에서 일어난 수많은 이야기, 그 허망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쉴새없이 만들어지고 부풀려지며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해 끝없이 퍼져나가 마침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된, 여느 합궁에 대한 이야기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녀는 근처에서 부엌살이를 하던 동향 친구를 만나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주고받았고, 일단 컨베이어벨트에 올려진 귓속말은 곧 자동공정을 통해 매우 그럴듯하고 선정적인 이야기로 부풀려져 온 동리를 거쳐 인근마을에까지 퍼져나갔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일찌감치 장터를 떠돌다 여자를 만나 결혼도 했지만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호떡장수와 눈이 맞아 달아나는 바람에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도 말솜씨가 좋았지만 이즈음해서는 그 솜씨가 더욱 늘어 어찌나 조리 있고 구변이 좋던지 이야기자락마다 한숨이요, 눈물이요, 박장대소였다.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즈음에는 청산유수로 쏟아내는 그의 말솜씨에 세 여자가 모두 넋을 잃어 국이 졸아붙는지 밥이 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것은 구라의 법칙이었다.
구라의 법칙ㅋㅋㅋㅋㅋㅋㅋ 어떤 작품을 읽고 나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도 다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 책인듯. 작가님의 위트가 너무 내 스타일이야.
살인과 강간은 범죄가 되었고 도둑질과 방화, 싸움질이나 남의 물건을 사사로이 빼앗는 것 또한 금지되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별로 할 일이 없어져버렸다.
이날 쏟아진 구호들 가운데, ‘벽돌을 못 쓰게 죄다 깨뜨려버립시다!’나, ‘가마를 부숴버립시다!’ 혹은 ‘공장에 불을 질러버립시다!’와 같은 주장은 잔뜩 화가 난 일꾼들 사이에서 일견 나올 법한 얘기였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온 ‘파쇼에게 죽음을! 노동자에게 생존권을!’이나 ‘재벌독재 타도하여 노동자 천국 이룩하자!’와 같은 구호는 산골짜기에 있는 벽돌공장에서 써먹기엔 다소 유난스런 감이 없지 않았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나 ‘수령님의 영도 따라 미제를 박살내자!’와 같은 구호는 다소 수상한 감이 없지 않은데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벽돌공장 웬 말이냐!’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독재 물러가라!’와 같은 구호는 다소 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는데, 또 어디선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영숙아, 사랑해!’나, ‘씹할, 그때 홍싸리를 먹는건데’와 같은 소리는 그야말로 구호도 아니고 뭣도 아닌, 분위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내지른 잡소리에 불과했다 아니할 수 없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영숙아 사랑해!ㅋㅋㅋㅋㅋㅋ 아 이거 이 내용만 써 놓으니까 다 전달이 안 될 텐데, 분명 다른 사람들도 이 책을 읽다가 이 부분에 당도했을 때 킥킥 댔을 거야 분명.ㅋㅋㅋㅋㅋ홍싸리가 왜 나와ㅋㅋㅋㅋ
사람들은 하는 일이 없어도 괜히 마음이 바빠 허둥거렸고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이유 없이 속이 헛헛해 다방을 찾아가 독한 커피라도 한 잔 들이부어야 겨우 속이 차는 듯싶었다. 또한 다방에 앉아 하릴 없이 이 말 저 말 옮기다보니 사람들 간의 관계는 더욱 번잡스러워졌고 시비는 늘어났으며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하느라 술값이, 혹은 커피 값이 더 많이 들어가 소비가 더욱 촉진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마음 속엔 어느덧 공허가 가득 들어찼고 금복은 이를 차곡차곡 돈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이었다.
곧 미사일론에 대한 반박이 뒤따랐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노파가 어떻게 미사일을 아느냐는 거였다. 귀신이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다는 해명에 대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라는 반박이 나왔으며, 뒤이어 어따 대고 선배 앞에서 그따위 개소리를 하느냐는 성명이 발표되자, 너 대학 어디 나왔냐는 질문이 나왔고, 이 씹쌔야, 어딜 나온 게 무슨 상관이냐는 반론이 제기되자, 저 새끼, 싸가지 없는 건 학교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는 인물평과, 저 새끼는 학계에서 완전히 매장시켜버려야 된다는 매장론이 뒤따랐으며, 선배 무시하다 뒈지게 맞고 피똥 싼 놈 많다는 협박과, 누군 씹할, 고스톱 쳐서 학위 딴지 아냐는 고스톱 학위론, 그럼 씹쌕꺄, 미사일이 아니면 도대체 뭐냐, 뭐긴 뭐야, 색꺄, 니 애비 좆이라니까, 라는 식으로 반박이 줄줄이 이어지며 논쟁은 점점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어 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래란 무엇일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실 고래의 의미에 대해서는 책의 중반부에 이미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싶지 않은 까닭은,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 아닐까? 그럼으로써 그녀를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 안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그 옛날 남발안의 계곡을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추천한다,는 상투적인 표현을 쓰기엔 이 책에 미안할 정도다. 하지만 추천한다.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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