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제가 이 영화를 안 본 줄 알았는데 책을 읽다보니 몇몇 장면들이 영상으로 떠오르더라구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미 영화 버전을 먼저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용도 결말도 잘 기억이 안 나고 중간 중간의 장면들만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영화는 그닥 저에게 감명깊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책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스포일러일 수 있습니다.
운전 중이던 한 사람이 갑자기 눈이 멀게 되면서 소설은 시작됩니다. 정체 모를 실명에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전염되고 오직 한 여자만 앞을 볼 수 있습니다. 전염된 사람들은 정부에 의해 격리 조치 되지만 곧 그 한 여자를 제외한 나라의(어쩌면 세계 전체일까요) 모든 사람이 전염되면서 나라는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만은 버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고 오직 생존만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도 있죠. 뭐 결국 마지막에는 사람들의 시력이 하나 둘 씩 돌아오면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 책에서는 대화를 표시할 때 나타내는 따옴표("")를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음표도 나오지 않아요.
경찰을 불러, 저 똥차를 여기서 치워, 그들은 소리를 질렀다. 눈이 먼 남자는 애원했다, 누가 날 좀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신경이 문제라고 말했던 여자는 구급차를 불러 그 불쌍한 남자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눈이 먼 남자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필요 없습니다, 누가 우리 집 앞까지만 데려다주면 됩니다, 아주 가까운 곳이에요, 그렇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차는 어떻게 하고, 어떤 사람이 물었다.
이런 식입니다. 하지만 누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화자가 위처럼 알려주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는 지루하다거나 답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저도 그 현장에서 같이 눈이 먼 사람이 된 것처럼 몰입이 잘 되더군요. 상대방의 표정, 제스처, 눈빛 그 어느것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서로의 목소리로만 대화해야하는 상황을 독자들도 느껴보라고 이런 방식으로 나타낸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나름대로 느끼는 바도 있었습니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선 눈 뜬 자가 왕입니다. 눈 뜬 자가 이쪽이라고 하면 이쪽이고, 저쪽이라고 하면 저쪽입니다. 의구심을 가질 순 있겠으나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순 없습니다. 그저 눈 뜬 자가 정직하고 선한 사람이길 바라는 수 밖에요. 또한 눈 먼 자들 사이에서도 권력자가 생겨납니다. 그들은 무기를 갖고 다른 자들을 협박하여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죠.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역시 눈이 멀었기 때문에 무기가 있다 해도 제대로 사용하기는 힘들거든요. 그리고 무기는 영원하지 않죠. 언젠가는 못 쓰게 되는 순간이 올테니까요.
왠지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책입니다. 저는 아마 아직까지는 눈 먼 자인 것 같습니다.ㅎㅎ
읽다가 어쩐지 와닿아서 메모해두었던 구절을 적으며 마무리합니다. (편의상 ""를 사용했습니다)
"이거 원, 실명은 원래 옮는 것이 아닌데. "
"죽음도 옮지 않죠, 하지만 우리 모두 죽지 않습니까."